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呂準(1862~1932) 의 民族運動 硏究

  • 발행기관 아주대학교 교육대학원
  • 지도교수 조성을
  • 발행년도 2005
  • 학위수여년월 2005. 8
  • 학위명 석사
  • 학과 및 전공 교육대학원 역사교육
  • 본문언어 한국어

초록/요약

呂準은 본명이 呂祖鉉으로 1862년에 龍仁 遠三面 竹陵里에서 태어나 滿洲事變이 일어난 그 이듬해인 1932년에 만주에서 生을 마감한 교육자이며 獨立運動家이다. 그는 舊韓末 교육을 통해 救國運動을 펼쳤던 교육운동가이며 국권 피탈 후 滿洲에서 독립운동에 참가하여 활발한 활동을 펼쳤던 名望있는 독립운동가임에도 불구하고 현재까지 그에 대한 연구는 현재까지 거의 이루어지 않고 있다. 呂準에 관한 연구의 시작단계라 할 수 있는 本 論文에서는 呂準에 관한 자료가 제한적이고 단편적이지만 이를 분석하여 그의 생애를 4단계로 나누어 고찰하였다. 그 첫 번째 단계는 呂準이 고향 龍仁 遠三面 竹陵里를 떠나 서울에서 본격적인 漢學 수업을 하며 科擧를 준비하던 시기인 그의 나이 20대에서 신학문을 공부한 30대에 이르는 시기로서 再堂叔인 呂圭亨의 주선에 의해 서울에서 成均館에서 수학하며 과거 준비를 하여 성균관과 4부학당 재학 유생을 대상으로 한 과거시험인 應製에 응시하기도 하였지만 呂圭亨의 관직 생활은 순탄치 못하였기 때문에 呂準 역시 관직에서 그의 목표를 이룰 수 없다고 판단하고 李相卨, 李會榮, 李始榮 등과 交遊하며 함께 신학문을 공부하여 박학다식한 지식체계를 이루었다. 또 그는 근대 교육과정을 도입하여 새롭게 바뀐 成均館에서 관장인 이상설의 의해 直員으로 활동하였으며 梁啓超의 社會進化論을 수용하여 교육을 통해 민족의 실력을 양성을 통해 해야 한다는 생각을 가지게 되었다. 두 번째 단계는 呂準이 40대에 이른 시기로서 이상설과의 관계로 볼 때 일본이 황무지 개간권 양여를 요구하자 이를 반대하였으며 을사조약 반대운동에 참여한 것으로 짐작된다. 이후 그는 구국교육활동에 전력을 다하여 李相卨, 李東寧 등과 龍井에 민족 교육 기관인 瑞甸書塾을 세웠으며 李相卨이 헤이그 특사로 瑞甸書塾을 떠나자 그의 뒤를 이어 塾長을 맡았다. 본 논문에서는 呂準이 처음부터 瑞甸書塾에 참여하였다기보다는 李相卨이 헤이그로 떠나게 되자 나중에 瑞甸書塾의 교육활동에 참여한 것으로 파악하였다. 이어 瑞甸書塾이 폐교되자 귀국하여 新民會에서 활동하다가 신민회의 교육활동에 의해 李昇薰이 평북 정주에 세운 五山學校의 개교를 돕고 실제 교무업무를 주관하였다. 이때 新民會에 의해 서울의 尙洞靑年學院에 파견되어 교육활동을 하며 동시에 고향인 龍仁 원삼면 죽릉리에 三岳學校를 세워 교육운동을 펼치기도 하였다. 세 번째 단계는 신민회의 독립군 양성 기지 건설계획에 의해 滿洲로 망명하여 독립군 양성을 위한 교육활동에 매진한 그의 나이 50대에 이른 시기이다. 1910년 국권 피탈 후 가족을 거느리고 滿洲로 망명하여 耕學社와 扶民團에 참여하고 西間島의 合泥河에 세워진 新興學校의 유지발전을 위해 모금활동도 하며 교육활동에 힘쓰다가 나중에 이 학교의 교장에 취임하여 독립군 양성을 위한 교육활동을 펼쳤던 시기이다. 이시기에 그는 서간도 일대에서는 어느 정도 명망이 있었기에 교육자로서 이 지역 민족운동의 핵심적 역할을 수행했던 것이다. 마지막 네 번째 단계는 교육활동보다는 독립운동에 참여하다 그가 최후를 맞기까지의 시기로서 1917년 鄭安立 등과 東省韓族生計會를 조직하여 국내에서 滿洲로 이주한 동포에 대한 구제활동을 하였으며, 滿洲 吉林에서 大韓獨立義軍府를 조직하여 39명의 독립 운동가들에 명의로 <大韓獨立宣言書>를 발표하는데 결정적 역할을 하엿다. 이어 1919년 上海에 大韓民國臨時政府가 수립되자 西間島 지역의 軍政機關인 西路軍政署에 副督瓣으로 활약하였으며 臨時政府 間西總辦府 總辦에 선임되기도 하였다. 이후 臨時政府가 이승만의 委任統治 請願과 지역 연고에 의해 분열된 양상을 보이자 그는 滿洲 額穆縣에서 간도지역의 독립운동가들의 회의를 개최하여 임시정부의 改造를 요구하였다. 그는 결국 臨時政府가 분열되고 쇠퇴하여 원래의 상태로 복구될 기미가 없자 다시 독립군 양성을 위한 교육운동에 매진하여 新興武官學校의 후신이라 할 수 있는 儉成中學校를 설립하고 校長으로 교육활동에 진력하였으며 말년에는 滿洲에서 결성된 韓國獨立黨에 참가하기도 하였다가 滿洲事變 와중에 퇴각하는 中國 軍閥에 의해 최후를 맞이하였다고 한다. 呂準은 간도 龍井의 瑞甸書塾과 五山學校에서 교육활동을 하고 고향인 龍仁 遠三面에 三岳學校를 설립하여 구국교육운동을 전개하다가 국권피탈 후 고국을 떠나 滿洲에서 교육과 민족운동을 하다가 滿洲事變의 와중에서 그의 가족과 함께 비참하게 희생당하여 滿洲에서 최후를 맞이하였지만 그는 金道泰와 吳光善 등과 같은 훌륭한 독립 운동가를 길러내기도 하였다. 또 그는 민족사의 격변기를 살면서도 세속의 이익을 멀리하며 오로지 민중과 민족의 실력 양성을 통해 국권 회복을 목표로 하다가 국권피탈 후에는 독립운동에 투신한 참다운 애국지사라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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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차례
1. 머리말 = 1
2. 家系 와 新學問의 受容 = 4
1) 家系 = 4
2) 新學問의 受容 = 6
3. 敎育 活動을 통한 救國運動 = 15
1) 瑞甸書塾 = 15
2) 五山學校 = 21
3) 三岳學校 = 28
4. 滿洲에서의 敎育 및 獨立運動 = 33
1) 新興學校에서의 敎育 活動 = 33
2) 滿洲에서의 獨立運動 = 37
5. 맺음말 = 49
참고문헌 = 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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